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드워드 1세 (문단 편집) === 태자 시절 === 그 유명한 [[존 왕]]의 [[손자]]이자 헨리 3세의 [[장남]]으로 헨리 3세 때에는 할아버지 [[존 왕]]이 치세 시절에 일으킨 갖은 사고로 인하여 대헌장 [[마그나 카르타]]가 수립된 이후 왕권과 신권이 충돌하던 시대였다. 게다가 해외의 다른 국가들과의 사이가 좋지 못했고 내분도 심하게 일어나 잉글랜드의 국력은 무척 쇠약해져있던 시기이기도 했다. 그의 이름은 [[에드워드]]로, 지금에야 흔한 이름이지만 당시 잉글랜드 상류층들에게선 외면받던 영어 이름이었다. 노르만 정복 이후 잉글랜드의 지배층이 된 노르만족은 원래 하던 대로 프랑스식 인명을 더 좋아했기 때문이다.[* 노르만 정복 이전과 이후 왕들의 이름을 비교했을 때 어감 차이가 상당히 심한 것도 이 탓이다.] 에드워드 역시 웨식스 왕조 시대에는 에드워드가 세 명이나 있었지만 정복 이후로는 거의 잊혀진 이름이었는데, 뜬금없이 그가 이런 영어 이름을 갖게 된 건 아버지 [[헨리 3세]]의 공이다. 헨리 3세가 개인적으로 선대 왕인 [[참회왕 에드워드]]를 흠모해서 그의 이름을 아들에게 붙여주었기 때문이다. 결국 이러한 작명 덕분에 에드워드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왕의 영어 이름이 되었고, 거기에 그렇게 '에드워드'가 된 남자가 대단한 명군이어서 결국 [[에드워드 8세|8세]]까지 나오게 됐다. 에드워드 1세는 태자 시절부터 두각을 드러내어[* 16세에 가스코뉴의 영주 자격으로 가스코뉴 귀족들의 분쟁을 해결했다.]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악전고투하던 부왕 [[헨리 3세]]를 도왔으며 그 과정에서 많은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. 그중 가장 큰 위기는 귀족이었던 [[시몽 드 몽포르]]가 일으킨 2차 바론 전쟁에서 부왕을 도와 국왕군에 참전했으나 패배했던 일이었다. 프랑스 혈통의 귀족인 시몽 드 몽포르는 헨리 3세에게 있어 당대 최고의 정적으로[* 아이러니하게도 시몽 드 몽포르는 헨리 3세의 여동생의 남편이기도 했다. 즉, 에드워드 1세에겐 고모부가 된다.] 헨리 3세의 왕권 강화책에 불만을 품은 귀족들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며 그 힘을 바탕으로 왕을 압박하여 옥스퍼드 조례를 인정하도록 굴복시키기도 하였다. 그러나 헨리 3세는 옥스퍼드 조례를 지킬 생각이 없었기에 얼마 지나지도 않아 이를 번복하려 하자 시몽 드 몽포르는 분노하여 귀족 세력을 규합하고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. 이에 헨리 3세는 국왕군을 이끌고 진압에 나섰으나 오히려 루이스 전투(Battle of Lewes)에서 시몽 드 몽포르와 귀족들이 이끌던 군대에게 그야말로 탈탈 털려버리고 말았다.[* 당시 국왕군의 병력은 1만 명이고 몽포르의 반군은 5000명으로 국왕군이 우세했다. 그러나 이 싸움에서 에드워드 1세가 수하 병력을 이끌고 적을 선두에서 무찌르는 전공을 세웠으나 달아나는 적을 잡기 위해 전선을 이탈하는 바람에(...) 그 틈을 노린 반란군이 역습을 하여 헨리 3세의 본대가 털려버렸다고 한다.] 결국 에드워드 1세는 부왕과 함께 포로로 잡히는 굴욕을 당했다. 이후 옥스퍼드 조례가 통과되고 잉글랜드 의회가 소집되기 시작하였다. 그러나 에드워드 1세는 복수하기 위해 탈출을 감행하여 글로스터 백작인 길버트 드 클레어와 변경 귀족들과 함께 국왕군을 결성했고, 이브샴에서 다시 한번 시몽 드 몽포르의 반란군과 싸웠으며 마침내 이브샴 전투(Battle of Evesham)에서 반란군에게 승리를 거두었다.[* 이때 국왕군은 1만 명이고 몽포르의 군대는 5000명으로 루이스 전투 때처럼 국왕군이 우세했다. 이 전투에서 패한 몽포르군은 전사자가 4000명이나 되어 말 그대로 궤멸되었다.] 시몽 드 몽포르는 이 싸움에서 전사했으며, 에드워드 1세는 자신에게 큰 굴욕을 주었던 그의 시체를 찾아내 [[오체분시]]하여 사정없이 난자했으며,[* 고환까지 잘라 코 양쪽에 걸어두었다고 한다.] 몽포르의 장남, 즉 사촌인 앙리 드 몽포르도 처치하여 [[복수]]를 마쳤다. 이브샴에서 승리한 이후로 에드워드 1세는 왕세자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부왕이었던 헨리 3세 이상의 영향력과 권력을 손에 쥐게 되었고, 잉글랜드의 실권은 사실상 에드워드 1세의 것이 되었다. 명예욕에 불탔던 에드워드 1세는 큰할아버지인 [[리처드 1세]]의 선례를 따라 1271년에 제8차 [[십자군 전쟁]]에 참전하였다. 그러나 동행했던 프랑스의 [[루이 9세]]가 일찍 죽고, 명목상의 예루살렘 왕이었던 키프로스의 위그 3세는 [[바이바르스]]와의 휴전을 선언해버렸다. 에드워드 1세는 이 휴전에 반대했지만 이슬람 측에서 보낸 [[아사신|자객]]에게 부상을 입어 건강이 크게 악화되자[* 협상하려고 사절을 보내왔는데 이 사절은 애초부터 에드워드 1세를 죽이려고 위장한 자객이었다. 특히 문서를 직접 주겠다고 해서 가까이 갔을 때 바로 숨겨둔 단검을 꺼내어 죽이려 했다. 에드워드 1세는 무술로 이슬람 자객을 역관광시켜 죽였으나, 자객이 단검에다 독을 바른 터라 여기에 베여서 중독되는 바람에 치료를 해야 했다. 여러모로 [[바이바르스]]의 교활한 면모를 보여주는 일화.] 여러 악조건에 부딪혀 귀국하였다. 그 와중에 부왕 헨리 3세가 잉글랜드에서 병사하였고, 소식을 들은 에드워드 1세는 잉글랜드로 돌아오자마자 왕위에 올랐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